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톤 브루크너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린츠]] 근교의 시골 마을 안스펠덴에서 교사 집안의 [[장남]]으로 태어났다. 4살 때부터 [[바이올린]]과 음악에 대한 기초 지식을 부모에게 배웠고, 11살 때는 아버지의 사촌에게 [[통주저음]]과 [[파이프오르간]] 연주법을 배웠다. 하지만 아버지가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술집에서 댄스음악을 연주하다가 [[알코올 의존증]]에 빠지는 바람에 안톤이 13살 때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, 가세가 급히 기울게 되었다. 어머니는 가계 압박을 줄이기 위해 안톤을 린츠 근교의 장크트 플로리안에 있는 [[가톨릭]] [[아우구스티노회]] [[수도원]]의 기숙학교로 보내기로 결정했고, 3년 동안 수도원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바이올린과 [[피아노]], 오르간 등의 악기 연주법을 배웠다. 학교를 졸업한 뒤 수도원장 미하엘 아르네트의 주선으로 린츠의 교원양성학교에서 본격적인 교사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, 린츠의 유력 이론가인 아우구스트 뒤른베르거에게 [[화성학]]과 [[대위법]]도 배웠다. 1841년에 1차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해 [[보헤미아]] 근처의 벽촌 빈트하크에서 첫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, 턱없이 적은 급료에다가 성격이 괴팍했던 교장이 학교 수업 외에 텃밭의 농사일이나 교회 관리 등 과외 업무까지 떠맡긴 탓에 대단히 여유없는 일과를 보냈다. 결국 교장과 다투는 바람에 교구 학교들을 장학사 자격으로 시찰하고 있던 수도원장 아르네트로부터 징계성 전근 조치를 받았는데, 말이 징계였지 실제로는 더 좋은 조건과 높은 급료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. 2번째 부임지인 크론슈토르프에서는 대체로 널럴한 조건으로 교직을 맡았고, 여가 시간에 계속 음악 수업을 받거나 친구들과 조직한 합창단에서 지휘를 맡는 등의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. 1845년에는 2차 교원 임용시험을 통과하고 모교인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기숙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었다. 수도원에서는 교사 외에 오르가니스트로도 임명되었는데, 이것이 브루크너가 처음 가지게 된 음악가로서의 공식 직함이었다. 1855년에는 당대 음악이론 교육의 1인자였던 지몬 제히터의 문하생으로 들어갔고, 1861년까지 화성학과 대위법 등을 엄격하게 다시 배우면서 완벽한 이론가로 탈바꿈했다.[* 이때 하루에 7시간씩 대위법과 화성법을 공부했다고 하며, 그 근면했다는 제히터마저도 브루크너의 열성에 놀라며 그의 건강까지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.][* 이 6년 동안 브루크너는 딱 1곡밖에 만들지 못했는데, 이는 제히터가 제자들의 자유로운 작곡을 제약했던 엄격한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.] 제히터의 이론 수업을 마친 후에는 자신보다 10살 어렸던 린츠 오페라극장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음악형식론과 관현악법을 배웠고, 키츨러가 극장 상연에 열의를 보였던 [[리하르트 바그너]]의 오페라에서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. 키츨러와 공부하던 시기부터 브루크너는 교사 대신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혀 종교음악 외에 피아노곡이나 가곡, 실내악 등 세속음악의 창작에도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고, 수업 말기에는 첫 교향곡을 작곡했다. 1863년에는 브루크너가 작곡한 합창곡[* 정식 명칭은 게르만인의 행진 D단조(Germanenzug in d minor)로, 15개의 금관 악기가 반주하는 남성 합창곡이다.]이 출판되면서 처음으로 브루크너의 작품이 출판되기도 했다. 이후 전 생애 동안 창작에 매진하면서 [[바그네리안]]의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주었는데, 당시 바그너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[[요하네스 브람스|브람스]]와 그 추종자들로부터 이런 이유로 폄하를 당하거나 촌뜨기 취급을 받았다. 브루크너가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, 물론 자작 교향곡이나 여타 작품들의 공연이 계속 있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적었던 자신감을 더욱 억누르는 결과가 되었다. 이런 실패는 자작곡에 대한 무수히 많은 개정판을 낳게 되었다. 오히려 브루크너는 작곡 보다는 오르간 연주로 명성이 자자했고,[* 특히 즉흥 연주에 능했다고 한다. 다만 타 작곡가들의 작품은 바흐, 헨델, 멘델스존 정도만 연주했으며 주목할 만한 오르간곡도 남기지 않았다.] 1869년과 1871년에는 각각 [[프랑스]]와 [[영국]]의 국제 오르간 콩쿠르에 오스트리아 대표로 참가할 만큼 오르가니스트 브루크너는 1급 실력을 인정받았다.[* 사실 이때 브루크너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. 영국에서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때 원래 타려고 했던 배가 침몰했기 때문이다. 다만 브루크너는 이 배를 놓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.] 작곡가로서 브루크너가 처음 성공을 거둔 것은 교향곡 제7번이 [[라이프치히]]에서 초연된 1884년이었다. 그 직후에 초연된 현악 5중주의 전곡 초연도 대성공을 거두었고, 그 기세를 이어서 그 동안 실패했던 작품들도 점차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. 이런 유명세는 부와 명예를 얻는 것으로도 이어졌고, 1891년에는 비엔나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,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고 만년에는 [[프란츠 요제프 1세]] 황제로부터 집까지 얻게 되었다.[* 이는 원래 빈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의 최상층에서 17년 동안 살아왔던 브루크너가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.] 하지만 나이가 나이었던 탓에 브루크너는 점차 건강 악화로 고생하게 됐고, 1894년 후반에 빈 대학에서 마지막 강연을 개최한 이후로는 공적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.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조차 힘겨워했기 때문에, 황실에서는 벨베데레 궁전의 부속 건물이었던 단층 주택을 새로 제공했다. 창작은 계속 진행했지만,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[[9번 교향곡의 저주|마지막 작품이 된 교향곡 제9번은 3악장까지만 완성되고 4악장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버렸다]]. 사후 유해는 유언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대성당 지하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